#48_대화란무엇인가(데이비드 봄) : 7. 참여형 사고와 무한 (4)
파스칼 pascal
(본)
참여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만물의 근원은 무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진정한 존재는 무한하다는 의미다.
사고의 영역은 한계가 있다.
또한 ‘무한한 것’은 존재하며 유한한 것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주의력은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한계가 있는 주의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집중력이다.
무한에 도달하거나 접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 뇌에 일종의 침묵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뭔가로 가득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이 필요하다.
만물의 근원에 도달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핵심은 우리가 전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강해지면, 다시 말해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환경에서도 꿋꿋이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면 무한을 볼 수 있다.
무한을 보는 순간에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의식이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깨)
무한과 유한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주의력과 집중력이라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 있는 것은 [학습하는 조직]에서 언급된 ‘창조적 긴장’이다.
갑자기 [학습하는 조직]의 ‘창조적 긴장’을 소환해 보자.
‘현실을 명확히 직시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비전을 ‘유지’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유능한 사람이다.’
‘학습조직의 특징은 허공을 떠도는 근사한 비전이 아니라, 비전에 비추어 ‘현실’을 검토하려는 엄격한 의지이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기 위한 빈 공간이 필요하다.
마침 종교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적)
기독교 종말론에서 자주 사용되는 개념 중에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아직 종말을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의 실천의 근거가 되는 ‘이중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유한을 살아가는 자들이 무한을 늘 염두해 두어야 하는 ‘균형’을 말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상실의 시대]에서 ‘죽음’을 무한 메타포로 우리의 유한한 ‘삶’과 대비해서 말한다.
‘죽음 삶의 대극이 아니라, 일부로서 존재한다.’
내세를 믿던 안 믿던 삶의 종말(또는 소멸)은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동력을 준다.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한편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기도 한다.
종교인들에게 이러한 ‘균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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